바람의 畵仙, 독도 四季를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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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畵仙, 독도 四季를 품다
  • 和白新聞(화백신문)
  • 승인 2020.01.2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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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만년2- 화가 임천(林泉) 최복은

뇌졸증도 굴복시킨 애국심
‘독도 4계 ’ 대작(大作) 완성
남북정상회담, 독도서 개최해
우리 땅임을 전세계에 알려야

대가(大家)들은 유별나다. 그리고  다른 기질(氣質)이 있다. 특히, 이들은 ‘나만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편협된 사고, 더하면 한 고집이 있다.


이보다 더한 이가 있다면 ‘영혼의 바람’ 화가(畵家)’ 임천(林泉) 최복은(崔福殷·84) 일 것이다.


주장이 강철보다 더 강하고, 본인과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 그리고 ‘힘’ 깨나 있는 이에게도 ‘불’같은 성격을 드러낸 적도 일쑤였다. 이를 화지(畵紙)에다 붓으로 그려대니  기백이 넘칠 수밖에 없고, 동해 용마저 그에게 고개를 조아리지 않나 한다.


그는 경주 동해안 감포읍 감포4리에서 월성 최씨 해룡(海龍)과 파평 윤씨 임순(任順) 사이 위로 누님을 두고 1937년 음력9월13일 오전 7시30분에 태어났다.


한학에 박식했던 어머니 윤씨로부터 천자문(千字文)을 자장가로 들으며 자랐고, 4살 때 붓글씨와 천자문과 명심보감(明心寶鑑)을 익힌 ‘복은(福殷)’.


감포초등학교 4회 졸업생인 그는 일찍이  ‘그림’ 재주가 있었다. 재능이 탁월해 6년 내내 교실 게시판은 그의 그림이 독차지했을 정도였으니 소질은 천부적(天賦的) 이었다.


백용현 월간 미술세계 대표는 “임 화백은 남다른 필력과 범상치 않은 예술가적 재능을 지닌 작가다. 그 영혼의 바람은 움직이는 물체도 전광석화처럼 낚아 채는 독수리의 발톱처럼 예리한 감각으로 찰나를 포착하여 화지(畵紙)에 담아낸다. 그래서 그의 미술 작업은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이 되고 역사가 된다”

25넌 동안 한 작업실에서 그려진 임천의 작품들.
25넌 동안 한 작업실에서 그려진 임천의 작품들.

문화고등학교 부설 감포기술학교 졸업한 그는 그해 1955년 18세 때 감포 인근 구룡포 출신 강연옥 씨를 만나 결혼한다.


다음 해 득남하고 그는 본격적으로 그림에 미치게 되는데, 1958년 가족을 두고 부산으로 가 당시 인텔리 장재봉 교수를 만난다.

이어 장 교수 추천으로 ‘영남미술학교’ 입학하면서 체계적인 그림의 세계로 들어섰다.


틈틈이 국제극장, 현대극장, 미화당백화점 등에서 발휘한 기량은 그의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하지만,  영남미술학교가 1960년 교육정책 일환으로 페교되자 마침 고향 감포지역 부자였던 박만도 씨가 지역에서 극장업 진출을 하자  큰물에서 놀던 그를 다목적용으로 스카우트했다. 운동도 잘했고, 영화 홍보에 필요한 광고 간판 제작 등을 겸한 ‘선전부장’이 됐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30대. 새로운 변신은 그가 영화배우였던 사실이다.


1966년 당시 국내 최고 배우였던 신영균, 문희가 주연한 ‘대석굴암’에서 일본 사무라이로 출연한 것과 신영균 등과 함께 ‘해 뜨는 섬’에도 캐스팅됐다.


그렇지만, 그의 진가는 1970년 초 당시 박정희 정부 때 터졌다.


 정부가 ‘경주개발’에 착수하면서 ‘불국사 복원도’ 전국 공모를 했는데, 그의 작품이 채택된다. 따라서 경주개발계획 구상이 그의 손과 머리에서 나왔지 않았나 한다. ‘불국사 지역 정화계획도’, ‘보문관광단지개발계획도’, ‘천마총 정화계획도’ 등이다.


불국사 복원과 경주개발에 대해 당시 박 대통령의 관심 정도에 대해 임천의 말이다.


“불국사 복원도 공모에 나의 작품에 채택되자 문화재관리국장이 직접 경주까지 내려와 축하해 주었다”


오늘의 경주가 세계적인 관광지로 탈바꿈된 것은 임천의 붓에서 나왔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성하다.


그가 1975년 그린 보문단지 조성 모형도(S=1/2000(190X180X64.5))는  대통령에게 브리핑 후 당시 경주개발공사(현 경북문화관광공사)에 보관 중이다.


 그의 ‘대작’은 이뿐 아니다.


한·일 간 독도 영유권 분쟁이 한창이었던 2012년 봄 그는 팔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화구를 매고 궐기한 것은 독도가 우리땅임을 일본에 확실히 보이고, 이를  그림으로 남기려 했기 때문.


블루진 복장은 화가라기보다  특수부대 요원인 듯한 그는 순시선을 타고, 때론 작은 오징어 배를 타고, 그리고 모터 보트를 타고 독도 해역을 구석구석 살폈다. 또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독도 정경을 눈에 담았다.


혈기가 펄펄 넘치는 젊은 화가도 손사래 칠 ‘독도 4계’ 작업에 뛰어든 그가 이 작품에 소요한 시간만 해도 2년.


 2011년 건강 악화로 붓을 놓고 요양을 해야 하는데, 다음 해 이스탐불 전시회까지 하자 그 무리로 뇌졸증을 일으키는 등 심신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가 화구를 들고 독도행을 한 것은 ‘애국심’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엉덩이에 ‘종기’가 나서 아픈 줄도 몰았고, 뇌졸증 후유증마저 굴복 시켜 탄생한 것이 대작 ‘독도 4계’다.


임천은 “독도가 우리 땅임을 전 세계에 알리기위해서는  남북한 정상이 독도에서 만나면 된다”


명예, 권세, 이념도 아닌 마음속에서 바람이 일어 오면 홀연히 화구(畵具)를 매고 작업실을 떠나는 임천. 


 온몸이 풍류(風流)로 휘감겨져 있어 그는 천생(天生) ‘바람의 화가’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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