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 잃은 대한민국 人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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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잃은 대한민국 人才
  • 和白新聞(화백신문)
  • 승인 2020.01.17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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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지칼럼_윤종현 화백신문 대표

중국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하면 어느 누구라도 ‘제갈공명’을 제일 먼저 언급한다. 그리고 조조, 사마의 등 순이며 그 유명한 방통(龐統) 방사원(龐士元)도 포함된다.
제갈공명의 능력과 지혜는 당시 한(漢)은 물론이거니와 오(吳), 위(魏) 특히 위의 조조가 탄복할 정도로 인정한 인재(人才)였다.  현재까지도 중국은 물론 동양권 나아가 서방에서도 그를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며, 중국 인물 연구대상에 있어 공자(孔子)와 격을 같이 놓고 있을 정도다.
더욱이 그가 출중한 것은 죽을 ‘유비’를 살려 ‘황제’ 의 위치로 등극시킨 능력, 충성도다. 또한 투철한 국가관으로 무장된 고위 관료이자 유비의 ‘인재’였다.
그의 장점은 인재를 보는 눈이 정확했고, 숨은 장점을 활용할 줄 아는 탁월한 용인술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에도 그를 연구하는  이들이 많고,  정부기관이나 기업체 등에서도 인사 자료로 활용 하고 있다.
제갈공명이 꼽은 인재 중에 한명 ‘방통’이다. 방통은 외모와 달리 인재중에 인재였다.
삼국연의에 오의 손권이 방통을 만난  기록이 있다.
방통의 코는 들창코요,  짙은 눈썹과 시커먼 얼굴에 짧은 수염, 생김새가 괴이한 전형적인 추남(醜男)이었다.
손권이 방통에게 물었다. “공은 평생 무엇을 주로 공부하였소?”. 방통이 답하기를  “한 가지에 얽매이거나 고집할 필요 없이 상황에 따라 ‘변화’에 대응할 뿐입니다.”
또 손권은 그에게 “공의 재주와 학문은 공근(주유)와 비교하면 어떠하오?” 하니, 방통은 “제가 배운 바는 공근과는 크게 다릅니다” 라 했다.
주유는 손권의 최측근이었고 평생 주유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모른 방통이 주유에 대한 표현이 그를   불쾌하게 했고, 방통에게 “잠시 물러가시오, 공을 써야 할 때가 있으면 다시 부르겠소” 라며 박대했다.
제갈공명이 군사(軍師)로 불렀던 방통이 오나라 군주에게 퇴짜를 맞은 장면이다. 어쨌던 손권으로부터 스카웃트되지 못한 것은 그의 외모 즉 첫 인상과 말투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전에 방통은 조조와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방통은 조조가 간웅(奸雄)임을 간파하고 빠져나와 유비에게 의탁했다.
유비와 방통간에도 손권과 같은 유형의 일이 있었다.
뇌양현 현령으로 근무한 방통이 음주사건으로 유비에게 찍혀 ‘면직’되었다. 그런 그에게 적군이었던 오나라 노숙이 유비에게 탄원서를 썼다. 노숙은 방통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방사원은 백리(百里)를 다스리는 재원이 아니다. 마땅히 치중(治中) 이나 별가(別駕)의 직을 맡겨 처음부터 그 뜻을 펼 수 있게 해야 한다”
제갈량 눈 역시 노숙와 같았다. 그에 대해  유비에게 전한 말이다.
“사원은 백리지재(百里之才)가 아닙니다.가슴 속에 든 배움은 저보다 10배 낫습니다”  제갈량은 방통을 만리지재(萬里之才)로 봤다는 것이다.
이를 수락한 유비는 실세 장비를 특사로 보내 방통을 형주로 재기용한  장면을 사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여선대 대기지(與善譚 大器之. 방통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큰 그릇으로 여겼다)”
유비는  방통에게 부군사중랑장 직에 임명해 서천 정벌에 나섰고 방통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중국 5천년 역사는 전쟁으로 얼룩졌다. 전쟁에 있어 가장 기본은 물자와 ‘인재’였다. 생사가 달린 전쟁은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우리역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신라와 벽제 그리고 고구려간의 내전과 조선시대에서는 수많은 외침을 당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나라를 구하는 것은 훌륭한 인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한 것이다.
경자년은 진보와 보수간의 치열한 선거전은 불보듯 뻔하다. 그렇지만 이 전쟁을 통해 과연 우리사회가 어떤 이득이 있을 지 의문이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경제강국에 이른 것도 인재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인재들은 국가보다 색깔전에 휘말리고 있어 유감이다.
제갈공명이 방통을 선택한 혜안을 우리 지도자들도 참고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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