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 안희제의 백산무역 및 기미육영회 자금줄 등으로 고초겪어
"나라 위해 돈 내놓은 것 무엇이 큰일이냐"
범부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박정희와는 영남대 설립으로 '악연'
범부 김정설,대한민국이 낳은 최고 천재이자 사상가
日警 요시찰 대상...드러나지 않은 항일행적으로 '불법구금'과 '고문'만 당해
도야마 미쯔루 "범부,조선의 최고 인물"...박정희 정부, 국민운동-산업화-근대화 영향미쳐
朴,범부 화랑정신-새마을운동 실천..."경주 개발 직접 챙겨"
범부,우리민족 기질 '총명'해..."시시비비보다 '포용'해야"
문파-범부,독립운동 및 국가 헌신 화랑정신으로 여겨
정부 등 두 '영웅' 헌신 헛되지 않게 해야해
2024년8월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지 79주년 되는 광복절이다.
이 날은 우리 민족의 국권(國權)과 주권(主權)을 회복한 역사적인 기념일이자 새로운 대한민국을 알리는 첫 날이다.
이 광복을 두고 일제 치하 밀양폭파사건(密陽爆破事件)의 주역이었던 우봉(牛峯) 곽재기(郭左驥)는 이렇게 말했다.
”참 꿈 같이 우리도 나라가 있거든. 정녕 꿈은 아니지. 분명히 광복(光復)을 했단 말이야. 나도 나라가 있거든“
나라를 다시 찾은 기쁜 오늘 우리 대한민국 정치권과 국민적 정서는 양분되어 국가존립마저 불투명하게 하면서 광복정신을 '말살(抹殺)'하고 있다. 이 사태의 장기화는 국가안보 및 새로운 국토 수탈(收奪)의 빌미를 제공할 우려가 있고 이에 대한 책임은 정치권이 져야한다.
따라서 곽재기가 한 말을 청년사회나 기성세대들 그리고 정치권은 꼭 되새겼으면 한다.
우리나라가의 독립적 지위를 갖게 된 이 광복에 있어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헌신(獻身) 했던 많은 애국인사들 중에서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인물이 있다면 문파(文坡) 최준(崔浚-이하 문파,1884~1970)과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이하 범부,1897~1966)을 꼽을 수 있고, 두 사람은 경상북도 경주 출신이다.
광복절을 맞아 문파와 범부를 거론하는 것은, 그 첫 머리에 ‘무너지진 국가’를 구하고 '새로운 건국'을 위해 온 재산과 정신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문파의 애국심과 희생정신"
일제는‘조선의 3대 부자’로 경성(현 서울)의 이봉래,진주의 김기태,그리고 경주의 ‘문파’를 규정했다.
이 거부(巨富)들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헌납한 인물이 ‘문파’인데, 그는 300년 동안 지켜온 최씨 가문의 6훈(六訓) 중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또 좌우명인 “일이 있을 때는 단호하게 대처하라(有事斬然)”를 철저하게 실천했다.
그가 독립을 위한 대표적인 사례는 백산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에 거금을 내놨는데,현재로 추산하면 1000억 정도이며, 이 자금은 중국 상해 임시정부의 운영 및 독립군 군자금으로 활용됐다.
이에 대해 백범(白凡) 김구는 “임시정부의 6할은 ‘최준’의 주머니에서 나왔다”고 언급했으며, 더욱이 문파의 동생 최완 또한 임시정부 재무위원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돼 심한 고문으로 1927년 일기를 마쳤다.
또한 문파는 안희제가 설립한 육영단체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의 자금원으로서 깊이 간여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 외에도 태평양회의 청원서의 경주대표 등으로 일제로부터 경고문을 받았고 '집중감시 대상자'로 분류되는 등 36년간 내내 질흙같은 삶이었다.
이처럼 문파의 '애국심'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83년 전두환 정부로부터 고작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이어 노태우 정부의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때까지 특별한 대우를 받은 적도 없었고,독립운동과 헌신에 대한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300년간 지켜온 가문의 명승과 재산을 광복과 새로운 건국을 위해 희생과 헌납을 했지만 이승만~박정희 정부는 그를 찾지 않았다.
이러했기에 그를 진정한 애국자이자 헌신,국가를 위한(犧牲精神)의 표상으로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문파는 생전에 한 말은 이렇다. “나라를 위해 돈을 내놓은 것이 무엇이 그렇게 큰일 이냐”
"독립과 대한민국 위한 일념뿐인 범부 김정설"
문파보다 12살 아래인 범부는 “대한민국이 낳은 천재 중의 천재이자 위대한 사상가 그리고 교육자 더불어 경세가”였다.
문파와 범부의 애국심과 국가관 또 독립정신이 함축된 것이 백산 안희제가 1919년 설립한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기미육영회는 겉으로는 장학단체같지만,일제로 부터 독립을 할 경우 건국(建國)에 필요한 ‘국가 인재자원 양성소’ 였다.
1기 기미육영회에 선발된 우수한 두뇌의 청년들은 문시환,전진한 등 8명 인데,범부를 제외한 이들은 '고등교육'을 받아 해외대학 유학조건을 갖추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서당(書堂) 출신임에도 범부가 포함됐다는 것은 문파나 안희제 등이 범부의 항일관과 천재성 또 독립 후 새로운 국가 건설의 동량으로 봤기에 선발된 것이다.
범부의 ‘천재성’은 일본 유학에서 확인됐다.
현지 동양대,경성제대 등 유수의 대학에서 정식 유학생이 아닌 ‘청강생’으로 참관하면서 서양경제는 물론 철학,군사,정치까지 섭렵했고 일어는 기본이고 독일어,영어까지 능통하면서 칸트의 철학원서 또 노자사상 원서도 해석한 후 평론까지 했다.
그가 ‘천재 중의 천재’였다는 것을 故 김지하가 생전에 공식적으로 밝힌 적도 있다.
일본 체류기간에도 범부는 현지 조선학생들로 결정된 항일단체에도 간여한 사실이 일본고등경찰문서에도 기록돼 있고, 귀국 후 지식을 우리 동포와 지식인들에게 가르쳤다.
특히 범부는 자라는 세대들에게 우리말과 ‘역사의 중요성’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며 교육과 함께 민족성을 강조했다.
30대 중반 경상남도 진주 다솔사에 은거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역할,밀양역 폭파사건 등 일경은 당시 영남지역 주요 사건의 '배후인물'로 범부를 지목됐다.
이 다솔사는 일제강점기 영남지역 항일 및 독립운동 본산이었고, 핵심적 역할과 중심에는 ‘범부’가 있었다.
때문에 일경에 의해 수시로 ‘불법감금’당하고 고문일수만 해도 700여일에 이른다.
더욱이 일경의 요시찰 대상자였던 범부는 당시 일본 최고 지성인 천태종 고위승직자들에게 동양불교에 대한 특강을 1주일 간 한 사실이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되기도 했다.
미스테리한 행적,항일운동의 핵심적 배후,조선의 혼(魂)을 지키는 교육자 등 그의 차고도 넘치는 '반일' 행위였지면,일경은 그를 '법정'에 세울 결정적 증거는 찾지 못했다.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것으로,내선일체(內鮮一體) 총책이자 이토히로부미의 최측근이었던 ‘도야마 미쯔루’ 마저 범부의 천재성과 능력을 극찬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이와 달리 범부는 ‘우리 민족(民族)의 장단(長短)’도 지적했다.
“우리 민족은 지형학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살고 있지만,총명(聰明)하며 결함은 말살성(抹殺性)이다.자기에게 큰 이해(利害)도 없이 남을 ‘말살’해 버리는 폐단이 있고 누구나 실수(失手)가 있는데 이를 포용(包容)하지 않고 시시비비(是是非非)만 가리면 나중에 제 자신이 설자리가 없다.
이는 산과 골짜기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의 ‘골장패’ 기질(氣質)때문이며, 주자학(朱子學)의 폐단에서 비롯됐다”<<우리 민족의 장단...자아비판(自我批判)을 위한 종횡담(縱橫談),조선일보.1961.8.27.>>
문파 ㆍ범부 그리고 박정희의 경주
박정희 동상 설치를 두고 진보단체가 거센 반발하고 있다.
이를 보면 범부가 지적한 '우리 민족의 장단'을 지적한 말살성과 포용이 여과없을 정도로 적절할 것 같다.
문파와 박정희는 악연이 있다.
문파는 6.25 이후 1954년 경주의 최초 대학인 '계림대학'을 설립했고,초대 학장은 범부였다.
이 대학이 폐교되면서 문파는 대구대학과 청구대학과 통합시킨 후 ‘영남대’ 만들었고,그나마 남았던 가문의 재산을 '헌납'이 적절한지 아니면 군사정부에 '강제기부' 당했는 지 둘 중의 하나로 추측되고,이 대학의 초대 이사장은 박근혜였다.
박정희는 경주와는 특별한 연(然)이 없다. 그런데 박정희가 왜 경주를 그토록 사랑하고 애정을 가지게 한 동기부여자는 ‘범부’였다.
범부는 5.16 군사혁명 후 박정희를 비롯 군부 실세들에게 새로운 국가 건설 등에 대한 방향성으로 근대화,산업화를 집중 교육하면서 '국가정신'까지 주입시켰다.
특히 범부는 박정희 등 군부 측에 국가정신으로 '화랑정신(花郞精神)' 또 국민운동으로 '새마을운동'을 강조했다.
범부는 '화랑정신' 속에는 국가관,국가대통합,문화,소통,희생정신 등이 있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부각했고,이를 박정희 정부는 국가운영의 최고 교본으로 수용한 후 범부 사후 실행했다는 점이다.
70년대 초 통일전,화랑교육원,보문단지 개발,대릉원 발굴 등 이에 대한 주도를 박정희가 직접 챙기면서 업무 수행기관으로 ‘경주개발공사’까지 설립하는 열정을 보였다.
그리고 박정희는 사망 해인 1979년 두 차례 경주를 방문한 것을 통해 국정철학과 기조를 범부의 화랑정신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범부와 박정희의 관계에 있어 어설픈 학자는 ”박정희가 독재할 수 있었던 것은 범부의 영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범부의 화랑정신과 철학은 오직 대한민국을 위한 방책이었지 박정희 독재 수단으로 가르쳤던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박정희는 재임 당시 문파와 범부의 독립운동 등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예우를 하지 않았다.
문파와 범부의 광복을 위한 헌신과 희생은 댓가를 기대하지 않았고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한 '화랑정신'만 충만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제라도 정부와 경북도,경주시는 이 두 영웅(英雄)의 국가관과 헌신을 다시 살피는 것도 국가와 청년세대를 위함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