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香千里 - 부산아지매 이진희 “이름마저 잊은 들꽃 같은 인생… 경주서 활짝 피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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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香千里 - 부산아지매 이진희 “이름마저 잊은 들꽃 같은 인생… 경주서 활짝 피웠어요”
  • 和白新聞(화백신문)
  • 승인 2020.01.02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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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겁고 아픈 삶 경주서 행복 찾아
타향도 보듬는 바다 같은 그녀

부산에서 출발해 경주톨게이트를 들어서면 그녀의 가슴은 연인을 만나러 가는 두근거림으로 가슴이 벅차다.
모진 어린 시절 삶의 무게와 일상의 아픔을 품어주는 천년고도 경주. 그녀의 영혼의 고향이다.
그녀, 이진희씨의 경주 살이 13년의 삶을 듣기위해 그녀의 가게 ‘좋은사람들’로 향했다. 위치는 성건동 청하탕 사거리에 있고, 새롭게 가게를 연 동네 선술집이다.
가게에 들어서면 목재로 인테리어를 한 편안한 분위기는 부산 바다를 연상하며, 웃음으로 맞는 그녀의 모습은 밝다. 

부산 아지매는 부산 영도에서 1965년도에 4남 1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앙동에서 물장사를 했다. 그 당시는 현재와 같은 정수기가 없는 시절이라 물통에 직접 물을 부어주고 돈을 받는 형태였다고 한다.
부친은 장녀인 그녀를 무척 사랑하고 아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먹고 살기위해 바쁜 사회생활로 돌보지 못하는 동생 넷을 그녀가 돌봤기 때문이다. 부친은 “아이고 우리 양념 같은 딸”이라며 귀가하면 신문지에 꽁꽁 사둔 눈깔사탕을 손에 쥐워 줬다고 한다.
그녀는 먹지 못한다.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동생들의 손에 아버지의 사랑을 대신 전한다. 그녀의 유년기는 장녀라는 멍에와 가난으로 자신의 몫을 대부분 동생들에게 양보하는 삶이 이어진다.
1980년. 그녀는 송도중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서 일하며 야간 여자고등학교에 다녔다. 여자라는 사회적 차별과 아들 넷을 공부시키는 부모의 소외에 굴하지 않고 배움의 끈을 놓지 않는다.
새벽별을 보며 출근해 새벽별을 보며 파김치가 된 육신을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억척같은 삶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빛을 본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직장생활과 영민하고 밝은 모습이 직장의 신발 개발부서에서 근무하며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해 관리자로 올라선다.
일찍이 시작한 사회생활과 경험으로 인도네시아 ‘마인어’를 공부하며 인도네시아 공장의 관리자로 파견된다. 그녀 나이 24세. 운명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결혼과 중국 바이어 스카우트 제의에 그녀는 사랑을 선택해 고향 부산으로 귀국한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고난의 시작이었다. 말로 다하지 못하는 사연을 남기고 그녀 나이 37세에 1남 1녀를 부둥켜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어떤 일도 가리지 않고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다. 자식들을 위해….
그리고 그녀는 제일 먼저 자신의 장기 기증서약을 한다. “내 몸을 나중에 누군가가 사용할 것이니까. 나 자신을 아껴야 한다. 자기최면과 같은 것이다. 아니면 죽을 것 같았다. 자식과 나 자신을 위해 살아야 했다”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야만 했든 사연을 말하며 눈시울이 먹먹하다. 지금은 그녀의 아들과 딸도 장기 기증 서약을 했다고 한다.
그녀 나이 39세. ‘영도에서 나와서 영도로 돌아가면 망한다’라는 속설을 무시하고 그녀는 고향 영도에서 셀프 세차장을 시작했다. 장사는 잘됐다. 하지만 여자로서 기계관리가 힘들어 좋은 가격에 매각하고 가구점에 실장으로 취직한다.
안정된 가정과 자식을 위해 직장생활을 하며 편해질 무렵 엉뚱하게도 가구점이 부도가 난다. 자신이 관리하든 사람들이 눈에 밟혀 그녀는 가구점을 오픈해 같이 생활하던 식구들을 끌어  안았다. 부산에서 두 번째로 큰 가구점의 사장이 되어 성공의 가도를 달리며 큰돈도 벌었다. 그러나 하늘의 시련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건설회사에 납품하고 받은 어음이 건설회사의 도산으로 줄줄이 부도가 났다. 자신의 가산을 다 털어 거래처에 채무를 변제하고 그녀는 무너지는 가슴을 끌어안고 경주를 찾았다.
그녀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늘 경주에서 마음을 다잡고 오뚜기처럼 다시 시작했지만 이번만큼은 힘들었다. 중년의 나이에 다시 시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녀는 친구와 구룡포 경매장 구경을 가서 푸른 바다를 보다 도저히 더 살 자신이 없다는 마음으로 바다에 뛰어 든다.
아득히 멀어져가는 세상을 보며 눈을 감을 때 “아지매”하는 어부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때 그녀는 “내 딸은, 내 아들은…?” 번개가 때리듯 머릿속에 울리는 한 생각에 자신을 이끈 어부의 손을 잡았다.
이 소식을 듣고 부산에서 자취를 하던 자녀들이 경주로 달려온다. 그녀의 숙소는 세 식구의 울음  바다로 변하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경주로 모두 이주를 한다. 그때가 2006년이다.
그녀는 “내가 어려울 때 나를 품어 주고 죽음에서 삶의 기회를 준 경주가 이제는 나의 고향이다”고 마음먹은 그녀는 다시 시장 좌판부터 시작해 잠을 줄이고 투 잡, 쓰리 잡을 뛰며 돈을 모은다.
일하는 사람을 구하지도 않는 중앙시장의 옷가게를 찾아 “무엇이든 잘 파니까. 일하게 해 달라”고 사정해 그 가게 구석에 버려져 있다시피 한 재고를 다 정리해 준다. 그 일이 그녀를 옷가게 사장으로 이끈다.
경주에 온지 그녀는 13년이 지났다. 지금은 작은 인연으로 중앙동에서 주점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또 다른 도전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또한 월세 살이를 마치고 황성동에 27평짜리 아파트를 구입해 내년 2월 입주한다.
그녀의 아들과 딸도 성인이 되어 2014년에 한해에 모두 출가시켰다. 이제는 자신의 몸만 돌보며 일상을 즐기고 싶다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밝아 보인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내 어머니와 누이를 생각하게 하는 모습. 다시 한 번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삶이다.
그녀는 힘든 삶을 사는 가운데도 누구에게나 밝고 친절한 모습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와 친절을 베푼다. 언제고 시작될 또 다른 도전의 발판이며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경주는 마음의 고향이다. 그러나 관공서와 세무서에 가면 공무원들이 타 지자체와 비교하면 너무 불친절 하다. 담당자도 없다. 저기서 기다려라. 친절히 안내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산모에게 ‘질금’을 준다. 질금은 젓 땔 때 사용한다고 어른들이 말한다. 조금 더 친절한 모습을 보고 싶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어디에 사는지 물으면 누구에게나 “저는 천년 고도 경주에서 삽니다”라고 대답한다.
오뚜기처럼 일어서는 바다를 닮은 부산 아지매의 경주 살이가 평탄치만은 않지만 포기하지 않고 경주를 지키는 이진희 사장은 진정한 경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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