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스르는 筆力… 筆生花의 꿈을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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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스르는 筆力… 筆生花의 꿈을 이루다
  • 和白新聞(화백신문)
  • 승인 2020.01.17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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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만년_서예가 심천(心泉) 한영구
“지도자는 입덕(立德)…
신하는 입공(立功)해야
사람은 썩으나 먹은 썩지않아
묵향이 휘날릴 때는 태평성대”

‘화백신문’의 창간 목적 중의 하나는  ‘경북의 새로운 정신문화 창달’이다.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의 부족함은  ‘정신문화’의 실종이다.
이 결과, 현재 집단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만연됐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과 정신을 지킨 원로들을  본지는  제목 ‘묵향만년’에서 찾아본다.
편집자 주
“‘지도자’는 입덕(立德)해야 하며, 신하는 입공(立功)해야 합니다”
마흔에 성가[成家·학문 등 하나의 파(派]나 체계를 이룸)한 대서예가 심천(心泉) 한영구(81) 선생.
한 선생이 현재 정국(政局)을 ‘문자’를 쓰면서 에둘러 표현한 것과 정곡(正鵠)을 찌른 것은 붓(筆)의 힘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닐까.
‘심천’은  먹을 찍은 붓으로 그리고 한 획을 긋기 위해 일생을 번민하면서 자신과의 충돌, 붓과 싸움이었을 것이다. 
이는 붓의 도(道)를 이루는 힘든 여정이었고, 그만의 ‘붓의 세계’를 달성하기 위한 수행이었을 것이다.
‘팔순’인 그가  현재 정치 상황을  굳이 붓으로  쓰지 않고  입을 빌어 표현이 가능한 것도 정신세계와 몸에서 나온 ‘경륜’ 이 아닌가 한다.
그는 “소나무 뿌리가 다른 물질과 섞여  먹으로 만들어져  붓 ‘끝’을 통해 아름다움이 나온 것과  그 향이 수천 년 동안  지워지지 않는 것은 덕(德) 의 결과물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이곳은 한국 문학의 거두 ‘박목월’이 젊은 시절 보낸 곳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1940년생인 그는 일찍이 붓을 잡았다. 부모의 권유로 신식 교육이 아닌 동네 ‘서당’에 가서 한학과 서예를 배웠다.
그의 청소년기는 붓과 체본으로 함께 했고, 몸은 묵향(墨香)으로 피어났다.
청년 영구는 시암 배길기, 소현 김만호 등 당시 서예 대가의 문하생이었고.  또 인근 백석암의 고경 스님으로부터 ‘유불사상’을 배웠다
당대 최고 대가로 부터 학습을 받은 심천은 갑골문을 비롯해 행초서와 전서를 자신의 세계를 만들었고, 1970~1980년대 국전에 특선 등 8회 입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4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와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그의 화려함과 진가를 발휘한 시절도 있었다.
심천의 국전 특선작은 윤봉길 의사의 출가명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다. “대장부가 나라를 위해 집을 나가니,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인데,이를 심천이 붓으로 다시 표현한 것은 무엇일까.
당시 일제로 부터 수탈한 당한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해 헌신한 윤 의사의 ‘정신’을 오늘에도 승계되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현재 정치인들이나 정국을 움직이는 이들이 새겨야 할 대목일 것이다.
심천의 서실(書室)은 경주지역 관공서 중심가인 대구지검 경주지청 남쪽에 있다.
이 일대는 법률사무실이 밀집한 소위 법조 타운이다. 범죄, 소송 등으로 연일 시끌벅적한 곳이지만 이와 전혀 무관하게 늘 푸른 소나무처럼 정좌한 ‘심천서실’.
소란과 분탕이 일상화된 이 지역에 그것도 동종업이 아닌 ‘서실’이 떡 버티고 있는 것도 결국 붓의 힘일 것이다.

늘 푸른 소나무처럼 정좌한 ‘심천서실’.
늘 푸른 소나무처럼 정좌한 ‘심천서실’.

 

좁은 계단을 통해 서실을 오르면 심천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코끝에 전달되는 묵향은 ‘심천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20여 평 남짓한 서실에는 5천 년 전 역사가 펼쳐진다. 중국 고서와  함께 어우러진 심천의 글씨, 더불어 붓, 그리고 벼루, 먹 등은 한 폭의 ‘동양화’ 다.
서실이 있는 3층 건물을 금방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은 만여 권의 고서들과 붓의 무게는 심천의 평생동지.
특히, 백발인 그가 즐겨쓰는  사자성어는 유덕동천(唯德動天·오직 덕으로 하늘을 움직인다) 이다.
심천이 이 글귀를 후학들이나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의미다.

붓,  벼루, 먹 등은 한 폭의 ‘동양화’ 다.
붓, 벼루, 먹 등은 한 폭의 ‘동양화’ 다.

그는 “현재 덕을 베풀면 평화가 온다. 성공한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은 덕을 베풀었다. 그런데 작금을 보면 덕보다 아집뿐이며, 이 사회가 혼탁하고 정서가 메말라지고 있다” 고 했다.
서예 뿐 아니라 삶에서도 도를 이룬 그에 대한 후학들이나 주변인들은 그를 ‘대한민국 최고 서예 대가’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필력(筆歷)을 중국 서성(書聖) ‘왕희지’로 대신한다.
“당 태종은 왕희지의 광팬이었다.  태종은 300년 전에 죽은 왕희지의 글과 학문에 심취했다. 시중에서나 묘 등에서 왕희지의 글씨나 책이 나오면  모두 수거해 선비들에게 똑같이 글을 쓰도록 했다. 태종이 왕희지를 따른 것은 결국 당의 ‘정신문화’를 이루고 국가를 발전시키겠다는 의지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왕희지는 문무를 겸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국내 내노라 하는 서예가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심천’.
후학들은 그가  40세에 성가 했고, 현재 팔순에 쓰는 글을 신필(神筆)이라며 극찬한다.
심천이 주는 말이다.  “먹은 썩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썩습니다. 그리고묵향이 휘날릴 때는 태평하고 혼란기에는 그 향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심천서실의 겨울은 묵향만당(墨香滿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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